문화적 영향
잘못된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널리 쓰였다.[3] 이는 18세기 후반 제대로 된 코뿔소의 묘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뒤러는 아마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고, 고의적으로 다른 판화보다 값이 싸고 복사하기 쉬운 목판화로 그렸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28] 뒤러의 그림은 제바스티안 뮌스터의 '코스모그라피아 (Cosmographiae)' (1544), 콘라트 게스너의 '동물의 역사' (1551), 에드워드 탑셀의 '4족 짐승의 역사' (1607) 등 많은 자연학자의 문서에 영향을 끼쳤다.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는 1536년 6월, "Non vuelvo sin vencer" (옛스페인어로 '나는 승리를 안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뜻)의 좌우명과 함께 뒤러의 목판화에 기반해 그린 코뿔소를 그의 문장으로 썼다.[29] 뒤러의 목판화에 기반해 장 구종이 그린 코뿔소 조각은 21m의 높이의 방첨탑 아래 놓여졌고, 1549년 왕족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새로운 왕으로서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하고자 파리에 있는 성묘교회에 세워졌다.[30] 또한, 부조로 된 비슷한 코뿔소가 피사 대성당의 서 쪽의 구리로 된 문판을 장식하고 있다. 코뿔소는 많은 그림과 조각에 묘사되었으며, 도자기의 장식으로 유명해졌다. 뒤러가 그린 잘못 묘사된 그림의 명성은 1580년에서 1588년 마드리드에서 인도 코뿔소가 8년을 살고, 1684년에서 1686년 사이 런던에서 살아있는 코뿔소 전시회가 열리고, 1739년 전시회가 한번 더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았다.[31]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가 사용한 문장.
뒤러가 그린 코뿔소 모습과 그 모습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코뿔소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대중을 위해 살아있는 코뿔소들이 유럽으로 이송되면서 더 정확한 모습들이 그려지면서 18세기 중후반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바티스트 오드리는 1749년에 실물 크기의 클라라를 그렸고, 조지 스터브스는 1790년경에 런던에서 큰 크기의 코뿔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그림 모두 뒤러의 목판화보다 정확했고, 더 사실적인 코뿔소의 모습이 대중들의 생각에서 뒤러의 그림대신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오드리의 그림은 뷔퐁 백작 조르주루이 르클레르의 백과사전인 '자연 이야기(Historie naturelle)'의 삽화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널리 퍼졌나갔다.[32] 1790년에, 제임스 브루스의 기행문인 '나일강의 기원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Travels to discover the source of the Nile)'에서 뒤러의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모든 부분이 잘못 그려져 있고, 그 동물의 말도 안될 정도로 이상한 형태를 갖게 된 기원인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 그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제임스 브루스가 묘사한 아프리카 흰코뿔소의 모습도 인도 코뿔소와 눈에 띄게 다른 모습이였으며, 지금까지도 뒤러의 작품과 함께 많이 부정확한 그림이라고 인식되고 있다.[33]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뒤러의 그림에서 비늘과 비늘로 뒤덮인 판이 코뿔소를 묘사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코뿔소를 잘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런 양식화된 기호들이 개인이 기호를 해석하면서 이 기호들이 코뿔소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원래 코뿔소의 피부가 보이는 것보다 더 두꺼운데, 그려진 판과 비늘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를 제대로 묘사했다고 덧붙였다.[34]
마이센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에 소장 중인 코뿔소 모양의 도자기. 뒤러의 목판화를 기초로 제작하였다.
뒤러의 코뿔소는 아직까지 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30년 후반까지 뒤러의 그림은 독일에서 코뿔소의 성스러운 모습 때문에 학교 교과서에 실렸다.[4] 또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영감을 주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서는 뒤러의 코뿔소 모습을 걸어두었고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에 그 형상을 사용했다.[35]
스페인 바누스 항에 위치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Rinoceronte vestido con puntillas, 1956)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코뿔소 목판화의 감정가는 $866,500에 달했다. 이는 뒤러의 작품 중 가장 최고가였다.[36][37]